와룡산 

청룡사 역사

길도 없고 천과 야산으로만 되어있던 현 청룡사 터 를 보신 날, 야몽에 와룡산 정상으로부터 백발노인이 내려와 산 중턱을 깎아내리고 돼지 30여 마리가 내려와 뱅뱅 돌더니, 이윽고 대웅전 터에 자리를 잡고 앉는 기이한 꿈을 꾸셨다.

와룡산:  불교의 깊고 깊은 인연지


남으로는 저 아래 쪽빛의 바다와 섬들을 거느리고, 뒤의 삼면은 준엄한 봉우리들과 능선을 두르고 있는 이곳 와룡산 와룡골. 절이 많아서 '절골'이라 불리었다는 그 별명의 기원은 무려 서기 1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야(伽耶)의 역사 한 줄기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가락국 시조인 김수로왕(42-199)은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과 혼인하여 10남 2녀를 낳았다고 한다. 그중 일곱 왕자가 허왕후의 동생 장유보옥(長遊寶玉) 조사를 따라 출가하였고, 다년간의 수도 끝에 마침내 지리산 칠불암에서 득도하였는데, 이때 그 수도처(修道處) 중 한 곳이 사천 와룡사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사실 불교의 한반도 전래로 공인된 4세기보다 수백 년 앞선 시기이다.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 속에는 고대 가야에 이미 바다를 통해 불교가 전래,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초들이 남아있다. 와룡산은 이 땅에 불교가 처음 뿌리 내린 인연터 중 한 곳이자, 가야의 칠불을 비롯 수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던 뛰어난 수행처였다.


가야국 시대 이후 신라, 고려를 거치면서 와룡산 와룡골은 많은 사찰과 암자들로 번성하였다. 찾아오는 수많은 대중에게 공양을 제공키 위해 커다란 가마솥을 걸었던 '가마뚜등', 스님들을 위한 별도의 화장터인 '불티골' 등 그 자리와 이름이 아직 완연히 남아있다. 또한, 도량 전체를 아우르던 회랑 덕분에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고도 전해지니 그 융성했던 규모란 쉽게 가늠조차 어렵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사찰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사천 일대는 왜구와 맞서는 주요 격전지가 되었고 와룡골의 많은 스님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승병으로 출전하였다. 그들이 아마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일까? 와룡산의 사찰들은 이후 쇠락의 길을 따르게 된다. 융성했던 자취는 세월에 깎이고 무너져 흙과 수풀에 덮이고 감추어졌다.



  청룡사 창건 : 장룡(掌龍) 선사의 와룡골 중창


그로부터 4백여 년이 지난 1978년 가을.

비구니 장룡(掌龍) 선사께서 도량건립의 대원력을 세우고 행각하시던 중 와룡골에 이르렀다. 길은 끊어져 없어지고 야산과 계곡만이 굽이돌고 있던 지금의 청룡사 터까지 숲을 헤치고 오르신 그날 밤. 와룡산 꼭대기에서 한 백발노인이 내려와 산 중턱을 깎아 편평히 만드니 이윽고 돼지 30여 마리가 무리지어 내려와 터를 뱅뱅 돌고서 자리를 잡고 앉는 기이한 꿈을 꾸셨다. 백발노인의 모습을 한 와룡산 산신님이 가호하시고, 기도성취의 풍요롭고 신비한 힘이 있는 터임을 확신한 스님께서는 바로 이곳에 새로운 도량을 일으키는 불사를 시작하시게 된다.


먼저, 장룡선사와 스님을 따르는 대중들은 손수 낱낱이 돌을 머리게 이고 나르고 쌓고 놓아서 길을 만들었다. 불사는 시작부터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장룡선사의 대원력은 결국 이곳 와룡산에 천년고찰 수도처의 명맥을 다시 되살리고 중창하셨다. 오늘날 와룡골의 깊고 깊은 불교 인연을 이해하는 많은 이들은 오직 장룡(掌龍) 스님이었기에, 와룡(臥龍)을 손바닥(掌) 위에 놓은 듯 관장(管掌)하실 수 있는 스님의 원력과 정진력으로 이 불사가 원만히 성취되었다고 믿고 있다.


마침내 불사가 완성되고 대웅전 낙성식 및 사적비 제막식을 앞둔 전야.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도량의 비석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생겨나는 것을 도량에 있던 모든 이들이 목격하였다. 가까이 보니 무궁화꽃 형태를 띤 빛무리였다고 한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사적비 비문을 직접 지으신 혜정(慧淨) 큰스님께서도 방광(放光)의 순간을 목도하시고 장차 청룡사 도량의 인연과 공덕으로 이 나라에 도움이 되는 큰 인물이 나고 도시가 풍요로워지리라 예견하셨다.


멀리는 임진왜란, 가까이는 6.25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혼란과 슬픔을 지켜본 와룡산.

와룡산은 때때로 우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

마을의 오랜 주민들은 산이 진동하며 내던 무거운 울림소리를 종종 들었다고 했다.

청룡사가 창건되어 도량의 모든 대중이 기도정진에 힘쓰고,

때마다 수륙제와 호국승병제 등을 봉행하여 

의롭게 살다 가신 선열과 일체 고혼을 위로하며, 

도량에 많은 이들이 왕래하면서 와룡산은 점차 기운이 밝아지고, 

산맥은 그 웅장한 면모가 더욱 드러났으며

이제 더는 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와룡산 청룡사 사적비 (臥龍山 靑龍寺 事蹟碑)

대저 불교(佛敎)가 전래한 곳에 가람(伽藍)이 세워지고

가람(伽藍)이 있는 곳에 불법(佛法)이 머무나니

고로 사원(寺院)은 깨달음을 구하고[求之菩提] 

중생을 교화제도하는[化導衆生]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역대 조사(祖師)와 시방(十方) 사문(沙門)이 

이 도량에 머무르며[住] 수도(修道)하고 접화(接化)하였다.

우리나라[震域]에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들어온 지 천육백여 년의 세월[星霜] 

그간 명산대지(名山大地)에 숱하게 많은[如麻如粟] 

도량[蘭若;아란야]이 흥건(興建)하고 폐멸(廢滅)함이

그 횟수[其回其數]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여기 남해가 접한 웅위(雄威)한 와룡산 중턱에

또 하나의 승가람(僧伽藍)을 세우나니 그 이름이 청룡사이다.

동서와 북의 삼면이 병풍처럼 힘있게 둘러 있고

남으로는 멀리 삼천포를 바라보는 가히 수승한 터라 할 수 있다[可謂勝地].

일찍이 천년고찰이 자리 잡았던 인연지(因緣地)로서 그 자취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 유서 깊은 옛터에 다시 수도처(修道處)를 마련하게 됨은

어찌 금생(今生)만의 원력(願力)이리오, 다겁(多劫) 전생(前生)으로부터

간절한 발원이 아닐 수 없다.

이 절을 창건한 장룡비구니 스님이

야몽(夜夢)에 백발노인이 산중턱을 깎아내리고

돼지 삼십마리가 몰려드는 상서(祥瑞)를 보고

무오년(戊午年) 음력 팔월 삼일 이곳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대지는 7백평이여 대웅전 건평은 23평으로서

기와집[瓦家]이며 석가모니불상을 봉안하였다. 법당은 서남향이며,

뒤에는 주봉이 위엄있게 솟아 있고 앞에는 천황봉을 마주하고 있다.

대웅전 우측에 23평의 요사 1동과 5평의 수각(水閣)이 있다.

창건에 소요된 시재(施財)는 신도들의 수의(隨意) 동참금으로 이룩되었다.


이곳에 운수납승(운雲水衲僧)이 구름같이 모여 면벽정진(面壁精進)하고

심신단월(深信檀越)이 바닷물처럼 몰려와 기도 발원할 것이며

불일증휘(佛日增輝)와 법륜상전(法輪常轉)을 불전(佛前)에 빈다.



                                             불기 2525년 신유(辛酉) 구월 이십사일

                              속리산인(俗離山人) 비구 김혜정(金慧淨) 찬(撰)

                                                     송강(松崗) 정현주(鄭玄柱) 서(書)



 청룡사 불사(佛事) 연대기


1978년 창건주 장룡선사께서 터를 닦고 불사를 시작

1979년 초파일을 기점으로 대웅전 요사채 용왕당 건립됨

1981년 대웅전 낙성식 및 사적비 제막식

1982년 윤4월 괘불 조성. 

             국태민안과 호국승병 애국선열 위국장병 및 와룡산하 유주무주 고혼 천도를 위한 수륙제 및 생전예수제 봉행.

1984년 신도회의 원력으로 명부전 착공

1987년 명부전 완공 낙성식

1991년 염화실 건립. 기도자 객실체 및 어린이법회 운영

1993년 범종루 건립 및 낙성식

1993년 진불선원 건립

2017년 산신각과 산사문화공간 포담 건립

2021년 조왕 아뜰리에(대중 공양간 및 다목적홀)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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